그러던 내가 이제는 의사로서 사람을 ‘치료’한다기보다 그저 병을 ‘처리’하는 행위를 날마다 감정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게 휴식이 필요한건지 아니면 나의 달란트를 이제야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현저하게 변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약 20년 후에는 의사 자격증을 자진 반납해야할 것 같다. (지금도 나이들어 저급한 요양기관에 불법으로 의사자격증만 빌려주고 용돈벌이 하는 원료 의사들이 있다.이런 추태를 부리기전에 알아서 자진 반납해야한다. )
청력이 떨어진 노인들에게 자꾸 같은 말 반복하는 것도 힘들고 (과거에는 농아 환자를 위해 수화도 3개월간 배웠었던 나인데 ) 인터넷으로
주워들은 정보를 남발하는 환자와 말다툼하는 것도 지겨워 그냥 웃으면서 넘긴다. 환자가 내게 불만을 느끼면 더욱 성실하게 열심히 설득하던 과거와 다르게 이제는 그냥 큰 병원 전원을 권한다. 편법을 억지로 요구하는(보험용 진단서등) 이들에게는 현실을 설명해주려 하지 않고 적법한 범위 내에서 요구 사항은 그냥 들어주고 만다. 그들은 설명하려해도 본인들이 필요한것만 골라서 듣고 믿는 단순한 부류들이다. 관절염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보다 그냥 ‘관절염’ 한마디만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면 자신들이 생각했던것과 일치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간다. 의사가 참 능력있다고도 소문을 낼 것이다.
다만 나를 믿고 찾아와주는 환자분들에게는 내 모든 실력을 다해서 치료해 드린다. 별것 아닌 내게 존재 가치를 부여해주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감사한다. 또한 내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나의 최선을 다한다. 비혐조적인 환자와의 사소한 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 받으면 정작
필요한 환자들에게 힘을 쏟을 수 없다. 불필요한 가지는 매정하게 쳐버리고 필요한 가지만 남겨놓은 후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본다.
( 환자는 의사를 거부할 수 있는데 법으로 의사는 왜 환자를 거부 못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사실 의사가 환자를 안오게 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세상은 원래 정의나 의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취향대로 (어느 정도 합법적인)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타인에게
설득할 필요는 없다. 인연이 되는 사이는 눈빛만으로도 다 통하는 법이다.
( 가까운 과거 대한민국 의료계의 거성들의 청년시절때 쓰신 각서이다. 참 과거 분들은 진지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것 같다.)
체력도 그렇고 나이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 사고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사회에서의 내 위치에 대한 미련도 자녀들에 대한 내 희망도 이제는
다 내려놓을 생각이다. 내 아버지가 갑자기 ( 우리가족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 돌아가시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그렇게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셨는데 나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다.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장례비까지 본인이 다 준비하시고 가셨다.) 모든 것은 다 잊혀진다. 나보다 훨씬 잘났던 선배 의사들도 나보다 젊은 시절에 벌써 여러명이 떠났다.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남아있는 사람도 때가 되면 다 잊혀진지겠지. 명예도 권력도 다 부질없는 것이다. 남는것은 추억 뿐이다. 그럼 그것을 가능한 많이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야겠다.
그냥 하루하루 최선으로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 본다. 내 남은 운명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이제는 세상 모든 일 흘러가는대로 두고 볼 생각이다. 내 고집 세우지 말고 사랑을 가장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내 아이들의 인생도 그냥 묵묵히 지켜보도록하겠다. 막내를 제외하고 큰 두 아이에게는 내가 해줄 것 다 해줬다. 금전적인것이야 되는대로 해주면 될것이고 그 이상의 교육은 내 능력 밖이다.
나는 다시 과거의 순수함으로 돌아갈 것 같지 않다. 실수도 성공도 다 할만큼 했고 후회는 없다. 갑자기 늙어버린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불편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담담하면서도 오히려 평온하다. 태풍이 지난 후 새벽의 고요함속에 있다고 할까? 이젠 내 임무를 마치고 마음 편하게 벤치에 앉아 동네는 구경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머지는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남자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최소한 내가 해야 할 임무 중 80%정도는 한 것 같다. 나머지는 현상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조금씩 느낌대로 할 생각이다. 고민하기 시작하면 아직 내게 남겨진 의무는 많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더 열심히 한다고 내 인생에 변화는 없을것이다. 각자의 몫은 따로 있다. 세상 떠날 때 즈음이면 약 90%정도는 채워질 것이니 ‘A’ 성적이면 족하다.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의무보다는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더 생각하고 싶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을 생각하면서 내 느낌대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살아도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는 수준의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다. 과연 시간이 내게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하면서 하늘의 뜻을 받아드릴 뿐이다.
헬스장에서 자주보는 지나치게 뚱뚱한 노인 분이계시다. 걷기도 힘들어하시고 숨쉬는것은 옆에서 보기만해도 답답하다. 정말 오늘 내일 할 것
같은데 지금도 꾸준히 목욕하러 오신다. 오히려 건강하시던 나의 아버지나 내 병원 단골 환자분만 갑자기 떠나셨다.
내 나이 이제 50넘은지 얼마 안 되었다. 삶을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당연히 호기심을 포기해서도 안 될 나이다.
마음껏 모든 기회를 즐기면서 살아가보자. 아버지의 말씀대로 올해 봄에 피는 꽃은 얼마나 이쁜지 두루 살펴보면서 살아가야겠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말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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