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마중물
추억 속 과거 여행 대화
83년에 대학을 들어간 나는 386세대다. 당시 특별히 배고프지도 않았고 정치적 민주주의 이외에는 부족한 것도 없던 경제적 부흥시대였다.
물론 지금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인권유린부터 시작해서 많은 문제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춥고 배고픈 시절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가 6.25 휴전 된지 기껏 30년 된 시기였다. 기억에도 없는 아주 오래 전 사건말이다. 그 만큼 30년이라는 시간은 길고도 먼 세월이었는데 그런 30년이
또 한번 지나서 현재 2015년이다. 내 청춘시대가 그 만큼 먼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월 참 야속하게 빠르다.
그동안 우리는 많이 변했다. 일본보다 24년이나 늦긴 했지만 올림픽을 잘 치루면서 한때는 ‘아시아의 용’ 소릴 들었고 IMF를 잘(?) 넘겼으며
이제는 선진국이라고 억지로라도(?) 자부하고 있으니 대단한 민족이다. 하긴 요즘은 전자제품이나 스포츠로 거대한 미국과 맞짱 뜨고 있으니 얼마나 장한가? 한때는 대중국도 엄청 (개^_^)무시했던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똥배짱 민족으로 태어나 자라왔으니 그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편한 인연에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내가 뒷골목 깡패집단인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어쩔 뻔 했을까.
간혹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하시는 어른들 말씀을 들으면 황당할 뿐이지만 이 또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황당하니 내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싶지만 이 모든 것이 다 같은 하늘아래서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레알 추억들이다. 그만큼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압축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그러니 그 빠른 변화에 생각이 적응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운전하는데 뒷자리에서 어머니와 둘째숙모님이 추억이야기를 하셨다. 해방 후부터 6.25시절 거쳐 어머니 신혼인 서울 대조동과
갈현동 국민주택이야기까지 운전하면서 들으려니 다 신기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사셨던 곳이 너무 깡촌이라 6.25때 인민군도 안 들어왔었다던 둘째 숙모님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 때 부터 왕복 20리길을
등하교로 다니면서도 개근하셨는데 ( 추운 겨울에 고무신에 어설픈 옷 입고 2~3시간 걸려 등하교하는 초등학생이 지금 가능할까?)
나중에 초등 동생과 같이 갈 때가 제일 힘들었단다. 겨울에는 스웨터 털실 다 풀어서 다른 것과 추가로 연결해서 또 만들면 누비진 한복만
입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었다고도 하셨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이 촬영한 1950년대 시골)
전라도 광주로(시골에서 올라와 너무나 큰 도시라 놀랬었다 함) 중학교 유학가서는 오빠와 지냈는데 (당시 여자는 초등학교로 교육이 끝이라 다들 부러워했다네.) 주인집 세탁소 아주머니가 점심 먹는 틈을 이용해 동생 교복을 다림질 해주고 쌀에서 돌 거르는 법, 밥 짓는 방법 등도
다 가르쳐 줬다한다.
당시 자취하는 학생들의 반찬은 오직 김치와 고추장뿐이었고 잘 꺼지는 연탄불 이야기, 시골 계란은 유정란이라 먹지도 못하고 팔아서 생활에 보태서 워낙 귀했다고도 하셨다. (과거 내 아버지는 항상 웃으면서 그 당시 드신 고추장 때문에 속이 쓰리다고 하셨다. 물론 대학생들 옷은 다 군복을 물들인 것이었다.) 숙모님의 어머니가 깡촌에서 광주 하숙집까지 머리에 쌀을 이고 오셨는데 그 힘든 일을 당시에는 어린나이라 생각도 못했었다고도 하셨다. 다 나이들어서야 부모님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일 것이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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