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서, 성인으로서,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
초등학교때 일본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 ( 천엔 지폐 모델)와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쳐 전기를 읽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내 꿈은 한번도
바뀐적이 없었다. 대학 입학 때까지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요즘 아이들보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연히 일찍 결정 하게된
내가 오히려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찐따 모범생으로 고교생활을 마치고 (물론 내 고교 동창들은 나를 그렇게 안보지만 난 모범생이었다고 믿는다.^_^) 대부분의 착실한 의대생들과 같이 신입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활을 고교때와는 180도 달라지게 살았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꿔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했었다.
발음을 정확하게 하고 싶어 웅변학원 다니고 길가는 사람들에게 자꾸 길을 물어보는 연습을 했다. 와일드해지고 싶어서 열심히 다니던 교회와 공부는 뒷전이 되고 등산, 암벽 및 빙벽타기에 심취해서 산에서 외박을 밥 먹듯 했다. 여러 사람들 만나서 경험 쌓는 것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모든 모임을 피하지 않았고 물론 거기에는 술과 담배가 동행했다.
당시 시대 상황 상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부모님의 간곡한 권유도 있고 내 성격상으로도 처음부터 거리를 뒀다. ( 그 당시 과외나 데모 중 걸리면 은행 다니시던 아버지에게는 치명적인 승진 누락 요인이 되었고 나 역시 일찍 군대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교내에서 짭새들에게 구타당하면서 데모하는 학우들을 교실 창문 너머로 보면서 영어수업을 받던 우리 의대생들이 하도 한심해서 내가 수업 중 갑자기 일어나서
함께 나가자고 몇 마디 말하고 나갔었다. 나도 이념 써클 다녔으면 그놈의 '정'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지만 어눌한 말주변 때문에
리더는 못되고 총알받이만 하다 끝났을 것이다. 그때 수업 중 쌩뚱 맞게 나서던 나를 지금의 아내는 참 웃기는 한심한 친구로 생각했다고 한다. 달변가였으면 멋진 좋은 기억 이었을 텐데 말이다. 하여간 그때 3명이 따라 나왔고 이미 데모는 진압되어 우리는 수업에 다시 안들어가고 낮술을 먹었었다.
그래도 청춘의 건강과 열정으로 모든 것을 소화시켜 나갔다. 덕분에 학교 성적은 지금의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힘들 정도가 되었지만
내 나름 대학생활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다. 그런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랄발광을 떨었어도
결국 내 성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나이들어 변하는 정도 이상으로 변함이 없었다. 결국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 40년만에 다시 쳐보는 타이프리아터 )
의대를 간신히 졸업하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후 여러 병원을 거쳐서 혼자 개업한지 벌써 13년째다. 의사가 된지도 벌써 25년이다. (20년 이상이면 전문가라는 데 지금 전문가이겠지?) 그동안 국내 및 해외 의료 봉사도 많이 갔고 태풍 피해 지역에도 혼자 약품 챙겨서 가는 짓을 몇번 했다. 박애주의적 이기주의자인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다. 일종의 열듬감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나는 외형적으로는 의협심 있는 그런 의사이어야 했다. 그렇게 살아가야 내가 쪽팔리지 않았다.
사실 수술 방법을 현지 의사에게 전수 하는 것이 최상의 봉사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속해있는 직장이 너무 왜소하고 행정적인 절차도 복잡했다. 그래서 몸으로 떼우고 의료 기구들을 기증하는 수준이 반복 되어왔다. (나름 그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요즘은 좋은 학교에서는 그런 해외 봉사를 정기적으로 장기간 하는데 역시 일류 학교가 학생들 인성도 같이 키워주니 일류는 그만큼 그 이유가 있다. 괜히 일류가 아니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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