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4주일이 되어간다. 아버지께서 아름답다고 하시던 봄은 지나가고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우리 가족과
전혀 관계없이 세상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잘 굴러간다. 우리 삼형제도 동생들이 미국으로 귀국하기 전 까지 어머니와 같이 하면서
과거 아버지와 갔던 식당이나 커피숖 등을 둘러봤다.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잘 지낸다. 이제는 요란하던 삼형제
카톡방도 조용하다. 출퇴근 하면서 걷는 양재천에서도 아버지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퇴근길에 타워 팰리스의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으면
바로 2달 전 처럼 옆에서 웃고 계시는 것 같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한 한 평생이 끝났다는 서러움에 간혹 우시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잘 견디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더욱 긴 시간을 아버지가 더 심하게 아프시고 가족들도 힘들어하면 서로에게도 안 좋은 기억이 생길 수 있다는 이성적인 생각으로 지금의 아픔을 이기고자 하신다. 비록 아직은 아무도 안 만나고 계시지만 곧 평상심으로 돌아가실 것이라 믿는다. 아들을 세명이나 키우 강한 어머니시니 말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 삼형제가 참 독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입관할 때와 장지에서 하관할 때 잠시 감정에 북받쳐서 조금 울먹거린
것 말고는 어느 누구도 울지 않았다. 나야 투병 과정의 아버지 고통을 피부로 느꼈으니 그렇겠지만 착한 내 동생들도 쉽게 울지 않을 만큼
강한 성인 된 것 같다. 미국에서의 삶이 그만큼 그들을 강하게 담금질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 몇일 뒤에 있던 친구 부친상에 가니 삼형제들 눈이 다 뻘겋고 막내는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 수 록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데 먼저 부친상 당한 친구들 이야기 들으면 세월이
갈 수 록 더욱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LA 있는 동생 훈근이가 ‘요즘 더 아버지가 생각이 많이 난다’고 최근에 문자를 보내왔다. 사람은 다 같은 것이다.
나는 한참 된 듯 한 아버지 장례의 모든 과정을 이제야 되짚어보게 된다. 정말 정신없이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버지께서 췌장암 진단을 3월 11일에 받으시고 6월 11일에 소천하셨으니 정확하게 3개월이다. 초반 주치의사가 말한 여명의 최단기간의
경우가 되어버렸다. 의사들은 보통은 짧게 이야기하니 그 두배는 되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버지의 사망 선고 후 장례식장으로 가는
앰뷸란스 속에서 나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장례를 치루다 내가 문제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버지가 5월 27일 재입원 하신 후 2주일간 잠을 제대로 자본적이 거의 없었다. 병원 근무 하면서도 항상 모든 안테나는 아버지에게 쏠렸었다. 두통있다고 뇌출혈을 걱정하는 것 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다 싶어 씁쓸했다. 그래도 미국에서 온 동생들이 있어서 마음이 많이 노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기본적인 일들을 먼저 정하고 1시간의 여유가 있어 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 약도 먹고 주사도 강하게 맞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다시 오니 두통과 몸살이 어느 정도 잡힌 것 같았다. 먼저 아버지 지인 분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내 지인들에게도 돌렸다.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지 않고 내가 직접 글을 써서 아버지의 소천을 SNS로 알렸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사실 몇 일 전부터 어머니와 상의해서 아버지 문상에 조의금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도 더 명예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관습을 거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막내 숙부님과도 많이 상의했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소천하시기 전날 밤에 시골에서 친척 분들이 병문안 오셨다. 아버지의 상태를 보시고 바로 가셔서 엘리베이터 까지 배웅해 드리는데 갑자기 돈 봉투를 주신다. 그렇게
거절을 해도 기어히 숙부님 옷 주머니에 쑤셔서 넣어드린다. 그 순간 결론이 났다.
그냥 조의금을 받자. 빈소에서 저런 일이 발생하면 조문객에 대한 결례도 되고 선별해서 받는 모습으로 비춰지면 남 보기도 우습게 된다. 막내숙부님과 서로 얼굴 보면서 아버지가 결론을 내려주셨다고 말했다. 그래 남들 하는 일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하자.
아버지는 끝까지 우리를 다 리드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 임마 잔소리 말고 다 받고 조문객들 정중히 잘 모셔. 조의금 안 받는다는게 뭔 소리야? ’
빈소를 오전에 차리고 오후부터 아버지 지인 분들이 계속 오셨다. 병문안 갔다가 황당해 하시면서 장례식장으로 오신 분들도 몇 분 계셨다.
대부분 부고 공지를 보고 놀래서 오셨다. 오시는 분들마다 설명 드리고 상주로서 예의를 갖춰 드렸다. 아버지는 최대한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그냥 ‘당뇨 신장 문제로 입원했고 곧 퇴원하면 다시 만나자’고만 활달하게 말씀 하셨기 때문에 많은 친구 분들이 더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 지인들은 병원을 마치고 오는 관계로 주로 저녁에 왔다. 그분들의 조문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2박 3일이 흘렀다.
내 부친상에 조의를 표하러 온 지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고마운 분들이다. 멀리 미국에서 생활하면서도 내 상황을 알고 기어히 마음을 표시해준 친구들도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보물들이다. 평생 갚아야할 빚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고교 여자 동창들이 많이 와주면서 나를 참 착한 친구라고들 이야기했다는데 솔직히 많이 찔리면서도 그냥 조용히 넘어간다. ( 내 과거 쑥맥 청소년 시절만 아는 그 친구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성인이라는것을 이곳을 통해 솔직히 고백한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다는것을 지면으로나마 이실직고한다.)
그런데 나중에 통계를 내보니 나보다 아버지 지인분들이 더 많이 오셨다. 특히 수년전 아버지를 모셨다는 분들이 많이 오셨다. 10년 여년 이상 지난 과거 제일은행 재직 당시 부하 직원부터 여비서나 운전 기사분들까지 많은 분들이 오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삶이 어떻셨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학교 동창분들이나 사회 지인분들도 오셔서 유족들을 위로해주셨다. 그리고는 식당에서 본인들의 지인들과의 시간을 내서 담소를 나누신다. 이런 것은 어느 정도는 사회성을 생각해서 당연하다 생각된다. 하지만 옛날 부하직원이나 소위 본인들 말씀대로 ‘모셨다’는 분들은 객관적으로 조문을 오지 않으시고 마음으로 위로만 해주셔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시간을 내서 직접 오셨다는 것이 보통 정성이 아니라 본다. 또한 그런 분들을 곁에 두신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자상하셨던가 감동하게 된다.
나와도 연락 거의 안하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들이 부친상을 이유로 먼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줬다. 섭섭한 일로 소원해진 사이인 분도 와
주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앞으로는 나도 최소한 그 이상은 갚아야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좋은 날씨를 주셔서 삼우제까지 온 가족과 친척분들이 많이 가셔서 잘 마무리하도록 해주신 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시간 되는대로 찾아뵈어야겠다. 곧 나도 묻힐 자리니 말이다.
돌아와서는 가능한 감사 인사를 각각 해당 되는 분들에게 카톡 메시지로 사진과 함께 보내드렸다. 일일이 편지로 보낼 엄두는 나지 않아 (결례라면 결례일 수 있으나 도저히 우편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함.) 일부는 직접 전화 드리고 대부분은 사진과 함께 문자 메시지를 각각 개별적으로 정성껏 보내서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지인분들 중 총무직을 맡고 계시거나 대표성이 있는 분들은 직접 전화와 메시지를 전해드렸으니 다
그 소속 회원분들에게 전달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하는 것도 거의 이틀이 걸렸다.
병상일기를 다시 정리하면서 보니 모든 것이 눈앞에서 아련히 스쳐 지나간다. 아버지는 결국 신장의 문제로 돌아가신 것이다. 물론 췌장암의 간 전이로 여러 앞선 원인들이 있었지만 결국 신부전으로 심폐기능이 정지 된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암의 통증으로 고생하실 기간을 줄인 것 같다. 내가 통증을 크게 줄여 들이지는 못했지만 하늘에서 아버지의 통증을 줄여주신 것 같다.
나는 원상으로 돌아와 다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사회에 적응한다. 그동안 병원에 오신 환자분들은 대진의사에게 진료 받으면서 내가 부친상을 당한 것을 잘 알텐데 대부분은 아무 말 없이 평소대로 진료만 받는다. (굳이 말하기 껄끄러워서 그렇겠지. 이심전심으로 그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평소 가볍게 봤던 분들 중에서 정중히 예를 갖춰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 보면서 많이 배운다. (그래 저렇게 표현을 해야 그게 진정한 마음이자 예의다.) 더욱이 평소 가깝다고 생각해서 진료비도 할인해주고 치료 받으러 올 때도 기다리지 않게 바로바로 치료하게 해준 분들 중 몇 분은 내게 위로의 말 한마디 할 생각 없이 계속 똑 같이 조용히 같은 혜택 받으면서 치료받는다.( 세상 저렇게 살고 싶을까? )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알기를 바라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상대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말을 했어도 상대가 이해를 못했다면 그것은 말을 안 한 것 이다. 이런 것 복잡하게 신경 쓰기 싫으면 서로 그렇게 앞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괜히 친한 척 하지도 말고 서운해 하지도 말고 대접 받으려하지도 말고 말이다.
( 대일점 ; 적도 부근에서의 밤낮의 변화를 보이는 실제 자연 현상. 죽음도 이런 것 일 뿐이다.)
참고로 이번 일을 치루면서 몇가지 느낀 점이 있다.
1. 일단 앞으로 조문은 시간이 허락되는 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간이 안 되면 근조 화환이라도 보내야겠다. 결혼식같은 즐거운 일은
참석 못해도 조문위로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싶다. 와주신 분들의 정성과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직접 경험하고서야 깨닫게 된다.
2. 조문 오시는 분들 중에도 기본적인 복장을 갖추고 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평상복으로 그냥 오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직접 당해보니
최소한의 복장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다. 나 역시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정 힘들면 장례식장에서 넥타이라도 사서 사용해야겠다.
3. 장례를 치루는 입장에서는 조문객들이 식사를 할 접대 장소가 빈소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되겠다. 상주로서 조문객에게 추가 인사를 가려
해도 가다가 새로운 조문객을 만나 다시 빈소로 들어오길 수 차례. 그러다 보니 조문 오신 분이 식사 후 돌아가실 때 까지 인사를 못가서
결례를 하게 된다. ( 말은 안했지만 많은 분들이 서운해 할 것 같아 많이 미안하다.) 항상 빈소와 조문객의 식사 장소는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할 것 이다. 그나마 잠시 시간 내서 갔던 것도 아버지 지인 분들에게 인사를 안 드려서 그분들에게 서운하다고 지적을 받았다. 사실 내가 아
는 분들이 없어서 가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상주인 내가 가야지 누가 가겠는가? 어머니가 오실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다 경험이다.
4. 조의금을 낼 때 글씨는 격식있게 써야겠다. 특히 조의금 봉투에 속지를 제대로 잘 써서 돈과 같이 넣어드리는 것이 좋다. 또한 방명록에
이름과 함께 상주들이 알 수 있도록 관계도 같이 쓰면 좋을 것 같다. (유명인이면 모를까 한자로 이름만 쓰는 것은 절대 실례다.)
추후에 유족들이 다시 볼 때 와 닿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기본적인 격식은 교양이다.
5. 가까운 지인인 경우는 발인 날 아침에 가서 한번 더 위로해드리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장지 까지는 동행 못하더라도 당일 아침에 와주신 분들이 내게 많은 감동을 줬다.
6. 상주로서의 입장이 자주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번에 많이 배웠다. 문상 오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말씀 드릴 것인지? 고인에 대해 어느
선까지 말씀 드릴 것인지? 생각을 하고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생각 없이 나오는 말대로 상주노릇 했던 것이 제대로 자리 잡기 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 어휘 선정도 연세 지긋하신 분들을 만나는 것이니만큼 미리 생각해야할 것이다. 또한 집안의 먼 친척분들이 오실
것을 예상해서 미리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할 것이다.
7. 치료 연장 거부 신청서 ( 환자의 의지에 따라 불필요한 치료를 거부하는 서류)를 작성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일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좋겠다. 인공 호흡기계나 심폐 소생술은 당연한 것이고 심장을 뛰게하는 인위적인 어떠한 약도 전부 거부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다른 것을 다 거부하고도 아쉬워서 인위적인 약 투약을 허락해 놓으면 정말 어중간한 위치에서 기계 치료없이 환자로서의 고통만 더
길어지는 것 같다. 물론 갑자기 떠나게 되니 가족들이 임종을 지킬 수 는 없겠지만 임종을 같이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욕심일 뿐
환자에게는 오히려 고통일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서류를 작성했다.
8.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의 초등시절 추억과 함께 계신 친구 부친께서 두 분이나 연이어 돌아가셨다. 두 분 다 병원에서 수술 받으신 후
갑자기 돌아가셨다. 한 분은 대학병원에서 stent 시술 받으시고 퇴원 후 아침 식사 중 돌아가셨고 다른 한분은 역시 대학병원에서
폐암 수술 후 합병증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현대 의학으로 수명을 분명히 늘렸지만 삶의 연륜이 80이 넘으면 그냥 운명이 앞설 뿐이다.
내가 경험한 환자군의 평균을 보면 자신의 의지대로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것이 약 70세이고 그 이후는 급격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80세이후는 당연히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숨쉬는 것이 삶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럼 70세까지라도 내 뜻 대로 살게 되면 분명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 내겐 20년이 남은 것이다. 그것을 최대한 잘 가꿔야겠다. 정말 그만한 시간이 내게 주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사랑을 너무 늦게 알고 죽음을 너무 일찍 아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누가 이야기했는데 내가 지금 죽음을 아는 것은 결코 이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나의 후반부를 비울 것은 비우면서 채워야겠다. 물론 잘 골라가면서 채워야겠지...
그래야 하늘에 가서 아버지에게 칭찬들을 것이니까 말이다. 아니 정정한 아버지께 혼나지 않게 꼭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_^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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