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어제 밤에 이뇨제 160단위을 넣고 오늘 아침까지 8시간동안 70cc 나왔다. 1시간에 나올 양이 8시간에 걸쳐서 그것도 이뇨제를 통해서 나왔다. 어제만 해도 이뇨제 80을 쓰고 160cc가 나왔는데... 이젠 거의 기능이 멈춘 것 같다. 간병인과 함께 아버지 몸을 씻겨 드리려해도 너무 아파하셔서 이제는 간병인도 손을 쓸 수가 없다. 그 고통의 표정이 너무나 참혹해서 내가 얼굴을 뵐 수 없을 정도다. 한번 아프시면 머리에 땀이
한 시간 넘게 흘러내리신다. 눈빛도 완전히 달라지신다.
그저 조금씩 아버지의 통증 반응을 살피면서 팔다리를 올려서 몸을 닦아 드린다. 오늘처럼 고통으로 땀 범벅이 되신 모습을 뵌 적이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신다. 내가 통증은 책임져 드리겠다고 했는데 괜히 등 마사지 해드린다고 하다가 더더욱 고통스럽게 해드린 꼴이 되었다. 췌장암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정말 너무나 진행이 빠르다. 약을 그렇게 쓰는데도 통증을 힘들어하시는 표정이다.
아버지를 자꾸 자극 주지 말라는 내 말을 안 듣고 기어히 아버지를 씻겨서 미국에서 손주들이 왔을 때 할아버지 몸에서 향기가 나야한다는
간병인의 마음이 그래도 고마울 뿐이다.
동생들의 귀국 시간이 정해졌다. 준식이는 화요일 오후 5시 훈근이는 수요일 새벽 5시 도착이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잘 버텨주시길 기원한다.
다행히 나도 병원에서 대진해줄 의사를 구했다. 일단 11일부터 해주기로 하고 보건소에 신고했다. 계속 아버지 곁에서 지켜드려야겠다. 비록 의사인 나도 해드릴 일은 손 잡아드리고 부채 질 해드리는 것 말고는 없지만 말이다.
(8일날 오전은 미소도 보이시고 간혹 눈을 뜨셨지만 10일 이후는 마스크로 최대 용량의 산소를 넣어드렸다.)
6월 10일
평소처럼 아침 일찍 아버지 병실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나를 보시고 웃으시는 듯 했다. 분명히 웃음을 보이신 것 같아 순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의 혈압이 떨어지셨다. 동시에 주위의 기계에서 비상음이 울리고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각자의 위치에서 혈압 상승 약을 주입하고 기타 응급 치료등을 한 후 한참 있다가 다시 안정되셨다. 등만 보이는 여러명의 의료진들이 방안을 꽉 채웠다. 왜 빨리 호출 안했냐는듯한 주치의사의 항의섞인 지시가 간호사들에게 떨어지곤 했다. 난 놀래서 멍하게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그냥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이미 모든 기능은 거의 정지되어 약물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셨고 뇌 손상도 있을 것이라고 의료진이 설명했지만 그저 내 머리 속에 울릴 뿐이었다. 주치의께서 미국의 아들이 언제 도착하는지 물어봤다. 아버지가 미리 싸인 (연장치료 거부의사) 해 놓지 않으셨으면 이런 상황 후 바로 중환자실로 가셨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 이렇게 떠나가시는 구나. 삶이 이런 거구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와 숙부님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아버지의 고통을 진심으로 아시기에 어머니도 담대하게 이 순간을 맞으신다.
뇌기능도 손상 입은 상태로 오로지 약물에 의존해서 생존해 계시는 것이라고 주치의는 다시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모든 것이 고요 속에서
시간만 흘러간다. 이제 끝이 조금씩 가시거리 이내로 들어온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가 많이 힘들어 하신다. 보통은 십여분이 지날 수록 조금씩 안정 되시는데 너무나 힘들게 죽음과 홀로 싸우고 계셨다. 한참 지나도 여전히 숨 쉬시는 것이 너무 힘드신 것 같았다. 지금은 혈압 상승 약으로 유지 되고 있는데 의미 없이 고생만 시켜드리는 것 같아 괴롭다. 아버지의 의지대로 인공 호흡을 달지 않기로 하셨는데 심장은 약으로 인위적으로 뛰고 콩팥의 기능은 멈춘 상태가 되어있으니 결국 폐에 물이차길 기다리는 꼴이 된 것은 아닐까? 지속적으로 가볍게는 기도를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suction 을 해드리는데 오후가 되어도 아버지의 힘겨운 싸움은 계속 된다. 숙부님들도 큰형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아파 병실에 있을 수 없어 밖 복도로 나가셨다. 시간이 흘러도 편한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산소는 최대한으로 올려서 넣어드려 체내 산소 포화도는 100%로 유지되는데도 호흡 자체를 힘들어 하신다.
미국에서 오는 동생들 가족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만지고 임종을 지켜드리면 좋겠지만 도저히 아버지 혼자서만 고통을 짋어
지시게 해드릴 수 없었다. 어머니와 상의 후 의료진에게 투약 중지를 부탁했다. 의료진은 우리 가족을 잠시 만류하다가 상황을 이해하고 tapering 하라고 (인위적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약인 NE levo 투약을 줄여가라고)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린다. 35단위를 20단위로 줄이고
시간당 2 단위씩 줄이기로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몇 시간 이내에 심장이 멈추실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간호사가 의사의 지시를 따르려는데 내 마음이 흔들려서 조금만 더 기다려봐 달라 부탁했다. 몇 시간만 더 있으면 막내 준식이
가족이 온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어머니도 일단 교회 목사님도 곧 오시니 조금 만 더 기다리자 하셨다.
늦은 오후에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오셨다. 달려있는 많은 기계는 빨간색 경고를 보이면서 아버지를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서 가두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목사님 기도가 시작되면서 아버지가 심호흡을 편하게 하는 듯 했다. 그때 바로 준식이 가족이 도착해서 손녀들이 할아버지 손을 잡아주니 더욱 호흡이 편해지시는 것이다. 수시로 보였던 빨간색 경고등도 없어지고 호흡도 편하게 쉬시는 것이 모니터상에 보인다. 수 시간동안 힘들어하시던 그 호흡이 갑자기 편해지셨다. 많은 손녀들 중에 특히 평소에도 장녀 스타일로 마음 씀씀이가 깊으면서도 이번에 미국 명문 프린스턴 대학을 합격해서 기쁨을 준 수현이를 이뻐 하셨는데 곁에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것을 아버지가 느끼시는 것 같았다. 약물 투약을 중지해야할 갈등을 느끼게 했던 그 호흡이 갑자기 안정을 되찾으셨다. 수현이는 할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 꿇고 기도해드렸다. 아버지도 다 들으셨을 것이다. 분명히 들으셨을 것이다.
나는 약물 중지를 조금만 더 보류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LA 에서 떠나 비행기속에서 애타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둘째 아들 훈근이도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만질 수 있다. 지금의 상태면 아버지도 그것을 원하실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시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자정을 넘기면서 숨이 가빠지신다. 만약에 혈압이 떨어지더라도 추가 약물은 넣지 않기로 했다. 다 하늘 뜻이다. 아버지가 견디신다면 견디실 때 까지 가는 것이다. 다행히 낮만큼 힘든 호흡은 아니셨다. 새벽 3시경부터는 다시 안정된 호흡을 찾으셨다. 내가 아버지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드리면서 아버지의 따듯한 손만 잡아드린다.
( 2012년 어느 가을날 )
6월11일
그렇게 밤은 지나가고 11일 새벽을 병실에서 맞이했다. 병실 창문으로 밝은 하늘이 보이고 아버지의 얼굴은 다시 햇살을 받으셨다. 비교적
혈색은 좋으셨다. 숨 쉬시는 것도 양호했다. 편히 주무시는 것 같다. 비교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편하게 계셨다.
간병인과 함께 아버지의 온몸을 닦아드리면서 로션으로 발라드렸다. 그 동안 힘들었던 과정들이 뇌리를 스친다. 아버지의 하지의 근육도 야위셨고 둔부 살은 거의 없어지셨다. 복부는 많이 커져있으셨지만 가슴 이상 부근은 큰 차이가 없으셨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조금은 빠지셨지만 다행히 얼굴의 살이 빠진 상태가 아니시기에 지금도 얼핏 보면 친구분들과 운동 후 피곤해서 주무시는 것만 같다. 내 아버지지만 정말 인상이 좋으시다.
새벽이 되어 훈근이가 도착하고 드디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만났다. 아무 말 없이 훈근이의 손을 느끼고 계셨다. 훈근이도 아버지의 따듯한 손을 만지작 거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호흡도 비교적 편안하셨다. 주위에 많은 친척분들이 다 조용히 모든 순간은 같이 하셨다. 그때 담당 교수님과 의료진들이 아침 회진을 들어왔다. 모든 것을 상의하고 들어오신 듯 주위를 둘러보고 가족들이 다 모였다는 것을 들으신 후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의도적으로 심장을 뛰게하는 투약을 중지시키셨다. 나는 tapering 할 줄 알았는데 담당 교수님께서 완전 중지를 시키셨다. 조금이라도 더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기 위해 tapering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것은 아닌 듯 했다. 교수의 지시가 있자마자 간호사는 일정하게 약이 들어가도록 하는 기계를 꺼버렸다. 지금부터 심장이 뛰는 것은 체내에 남아있는 약기운 때문이라한다.
혈압은 조금씩 떨어진다. 자꾸 떨어지는 혈압을 내 손으로 막을 수가 없다.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멀리 미국에서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와의 헤어짐을 감당하게 되는 훈근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자꾸 약해지는 혈압수치에 당황한다. 아버지의 혈압은 1시간 동안 천천히 떨어지더니 오전 8시를 넘어서기 전에 EKG는 편평해지셨다. 동시에 호흡도 잔잔해지셨다. 힘겹게 쉬시던 Kussmaul repiration 도 멈췄다. 아버지는 멋진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미련 없이 천국으로 떠나시는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아케론 강의 카론 영감에게 이미 배 삯을 주고 레테의 강을 비행기로 건너신거다. 안색은 하늘나라가실 모습으로 점점 변하시면서 이마와 손의 온기가 사라져간다.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78년의 삶이 이렇게 끝나간다. 보성에서 태어나 동생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 집안을 일으키신 장남이자 우리 삼형제의 아버지. 정말 멋지게 살아가신 한평생의 드라마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 삼우제를 지내고 어느 친척분이 보내주신 아버지의 마지막 자취다.)
통증 치료를 위해 의사 아들인 내가 약속을 얼마나 지켰을까? 아버지를 위해 내가 최선을 다 한 것 일까? 아버지 가시는 길을 내가 잘 해드린 것일까? 남아있는 가족들의 욕심이 앞서지는 않았을까?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잡념들이 오고간다. 아버지의 이마를 쓸어드리면서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 내 입술에 닿는 아버지의 이마는 이미 차가와져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리셨다. 그래도 이젠 고통 없는 세상에 도달하셨다는 뜻이리라. 고생많으셨어요. 이젠 편히 주무세요.
‘아빠는 이발사다’ 하시면서 어릴적 내 머리를 말려주시던 아버지가, 투병하시면서도 내가 퇴근해서 오길 기다리시던 마음씨 착하신 아버지가, 후회 없는 삶이라고 남은 가족들 기분까지 신경 써 주신 아버지가 정녕 이제는 완전히 떠나셨다. 2주일 전 입원하시면서 이것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그 말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모든 것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병실에서 아버지와 보낸 그 몇주일이 반복할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담당 주치의사는 기본적인 절차를 거친 후 아버지의 사망 선고를 담담하게 내렸다. 내가 과거에 환자 보호자들에게 그렇게 했듯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주치 의사를 만나서 항암 치료의 모든 것을 들은 지 3개월여밖에 안되어 사망 선고까지 같이 동일인에게 듣게 되었다.
같은 의료인으로서 그들에게 할 말 많지만 다 최선을 다해 주셨으니 그냥 감사하고 넘어간다. 어짜피 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일 뿐이니 말이다.
침대위에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서 많은 기계들이 떨어져 나간다. 비상 경고음도 울리지 않고 조용히 떨어져나간다. 이제는 하얀 시트만 덮혀 있다. 아버지는 고통 없이 편한 모습으로 가만히 누워계신다. 얼굴을 덮어드리고 싶니 않아 그냥 뒀다. 아버지의 편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항상 좋아하시던 얼짱 각도 옆 모습은 여전히 멋지시다. 등도 안 가려우신지 가만히 누워 계신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내가 옆에서 따뜻한 아버지의 손을 만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저 세상 강 너머 안개 속으로 떠나셨다. 남은 가족들이 곧 찾아갈 곳에 가서 또 우리를 위해 좋은 집과 여행 다니기 좋은 큰 자동차를 마련하실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 삼성 서울 병원 장례식장으로 영안실 확약 전화를 건다. 아버지를 좀 더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예약도 받지 않고 사망
선고 후 선착순이라니 어쩔 수 없다. 다행히 딱 한자리가 남아있었다. 생각보다 내가 정신을 놓지는 않는다. 나의 이성적인 행동에 야속함
마저 든다. 입원하는 2주일 동안 8층의 병실에서 많은 통곡소리가 들려왔으나 우리 832호 병실에는 고요함이 앞선다. 어느 누구도 곡을 하지 않는다. 십여 명의 친척 분들도 다 담담하게 받아드리셨다. 아버지의 고통스런 투병과정을 다 알기에 마음이 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머니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조용히 보내드렸다. 막내 정옥이모님의 흐느낌만이 고요함사이를 스쳐 흐를 뿐 야속할 정도의 정막감이 병실 내 우리 가족들을 덮고있을 뿐이다. 창문너머 하늘은 그저 파랗기만 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 사람의 인생이 종지부를 찍기에는 너무나 매정할 정도로 조용히 흘러갔다.
죽음은 죽을 뜬 자리라는 말 처럼 자욱이 남지 않는다 한다. 세상은 아무 일 없던 것 처럼 조용히 잘 굴러갈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다 계속 웃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돌도 도는 것이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동안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모든 것에 다 감사드립니다. 우리 삼형제가 어머니 잘 모시고 살고 있다가 갈께요.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계세요. 우리도 순서대로 곧 따라 갈께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자랑스런 나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2013년 어느 여름날 )
( 난 삼형제의 큰아들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잘 자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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