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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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배운 장기판 위에는
궁을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왕과
그의 소극적인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은 궁에 남아 대개 최후까지 살아남았지만
제 땅과 제 목숨만 겨우 지키며
오직 보호받고 숭배받아야 할 존재일 뿐,
다른 말들을 위한 역할은 못내 빈약했으므로
나는 그 모양새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후퇴없이 끝까지 제 몫을 해 내는
‘졸’들의 존재가 훨씬 더 명예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과 함께 체스를 배우면서
크게 느끼고 감동받는 부분이 있으니,
체스의 퀸은
막강한 능력으로 영토의 전방을 누비며
모든 말들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보호자가 되어 준다는 점이다.
퀸이 최전방의 폰 하나를 지키기 위해
저 멀리 길 끝에서 버티고 있을 때
내 땅이 아닌 곳에서조차 안도를 느끼고,
그 퀸을 수호하기 위해 한발 비껴 선 나이트가,
그 나이트 바로 곁에 왕이 버티고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강력한 유기적 전선이 형성된다.
직접 붙어 수호하지 않아도,
바로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떠먹여주고 막아주지 않아도
멀리서 영향력을 불어 넣어주고
각자 스스로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도와주는
진정한 킹과 퀸,
그리고 그로 인해
더욱 능동적으로 주행하는 체스판 위의 말들.
모든 종류의 인간 집단에 있어
어느 한 쪽이 불균형한 힘을 가진 채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지시하는 관계는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발전적이지도 못하므로
남편은 킹이 되어 중심을 잡고
나는 퀸이 되어 전횡하며 살피되
아이들은 각자의 자질과 능력에 맞게
스스로의 길을 헤쳐나가도록 돕는 것이
우리 가정의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하게 개입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까지 책임져주려 하지 않고,
꼭 필요한 것들을 방치하지 않고,
오늘의 사탕 한 알을 위해 미래를 저당잡지 말고.
이 나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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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기도하며,
오늘의 투표 단상.
- 존경하는 어느 페친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