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유명하다는 분식집이 몇군데 있다. 아이들이 말하는 곳은 당도가 높아 나와는 맞지 않지만
엄마들 입소문 탄 곳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겠다싶다. 미도 상가의 김밥집은 양 옆의 텅빈 김밥집과는 다르게 꼭 그곳만 장사진을 이룬다. 은마상가의 칼국수 집도 비슷하다. 한달에 한번 정도 아이들과 가는데 항상 좌측의 수제비 칼국수집은 만원이라 손님들은 서서도 기다리는데 우측의 칼국수 집은 단 한사람도 없다. 정말 단 사람도 먹는 것을 못봤다.
기다리느니 옆 가게에서 한번 먹어보자 하는데 아내는 부득불 다 이유가 있을거라면서 기꺼이 서서대기한다.
사실 킬국수가 맛있어봤자 얼마나 다르겠냐 싶은데 사람 심리라는 것이 묘해서 한번 소문난 곳은 여간해서는 망하지 않는다.
그곳에 갈때마나 우측의 칼국수 집을 지키는 2명의 아주머니들이 불쌍해서라도 한번 먹어줘야하는데 혼자 올 수도 없으니 하여간
올때마나 안타깝다.
어제는 그나마 주인 혼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우리가 먹고있을 그 시간에도 사람들은 줄 서서라도 꼭 한곳만 고집한다. 왜 그럴까?
보나마나 서로 사이가 좋을 리 없을 것같은데 이 가게는 왜 팔지 않고 저렇게 열받으면서 버티고 있는 지도 참 궁굼하다.
정말 칼국수 맛은 단연코 별것 없이 그저 싸고 깔끔한 시골 분식집 수준이다.
오히려 기다리는 뒷사람들 시선 때문에 마음 놓고 천천히 먹을 수도 없다.
최근 ‘국물녀’니 ‘임신부 폭행’이니 하면서 인터넷을 떠돌며 공룡처럼 자라나다 사실 무근으로 판명난 사건들을 보면
민중은 절대 성숙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런 미성숙의 배설 행위를 즐기는 부류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이들에게 진실은 의미가 없고 다만 매도되는 일정한 가십거리 희생자가 그때 그때 필요할 뿐이다.
누구나 익명이 보장되면 깊숙히 내재되어있는 자신의 본능이 표출 되는 법이다. 그래서 더더욱 동호인들끼리 어울리는 사적인 공간은
몰라도 공공성이 짙은 매체에 한해서는 실명제가 진정 필요하다 본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자식 사랑 나라 사랑등 모든 고상한듯한 감정도 결국은 자신의 행복으로 귀결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변화에 따라 비상식적인 헛짓 하고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딱 한번만 한다 해도 이것은 계속 살아 숨쉬면서 성장하여 사회를 갉아 먹게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된 바스티유 감옥의 정치범 석방이라는 고귀한 목표도 사실 소수의 일반 잡범밖에 없었으니
감옥을 지키다 죽은 군인들만 억울할 뿐이다.
결국 경제난으로 성난 민중을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선동한 꼴이 된 것이다.
정의와 진실의 열매를 위해서는 세월의 대지가 필요한데 성숙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문명의 발달이 가로막고 있다.
침묵의 여과 과정이 저절로 생략 되어가는 세상이다.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이 사소한 모든 것들이 다 인류 역사의 소중한 일부분일 뿐이다.
다만 다수의 민중이 시대적인 정의일 수는 있어도 영원한 진리는 아니라는 것만은 기억하자.
나부터라도 침묵의 발효 과정을 놓치지 말아야하겠다.
2012.2.29
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