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아버지 49재인데 평일인 관계로 이틀 앞당겨서 일요일 새벽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아내와 장손인 형규도
동행했다. 새벽의 선선한 공기와 흙내음는 비온 다음이라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고 멀리보이는 새벽 안개는 슬픔을 보듬어주었다.
고요한 공원묘지를 굽이굽이 들어가니 저 멀리 아버지와 조부모님 산소가 보인다.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과거 조부모님 산소로 걸어
갈때와 사뭇 다른 애처로움을 느끼면서 어머니를 부축해서 걸어갔다. 전에 없었던 아버지 산소의 비석도 우뚝 서있다.
검정 비석에는 아버지 성함이 가로로 또렷하게 적혀있다. 언젠가 쓰일 어머니 성함의 공간을 아래에 두고 아버지 한자 성함이 천국행 표에
철인 찍듯이 상단에 또렷하게 박혀있다. 비석 뒤에는 부모님의 후손들 13명의 이름이 한글로 적혀있다. 여기가 이제는 정말로 아버지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뿌리이자 역사인 곳이다.
우리는 말없이 아버지 산소에 자라나고 있는 잡초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다녀간 지 2달이 안됐는데 그 사이 많은 잡초들이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옆의 조부모님 산소도 잘 다듬어 드렸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인사드리면서 또 눈물을 흘리신다.
아직은 눈물이 마르지 않으셨나보다. 그래도 아버지는 고통없는 세상에서 평하게 살고 계실 것이라는 위로로 분위기를 바꿔봤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살아있는 사람의 몫일 뿐이며 아버지는 편한 천국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아버지 산소에 오면 뭔가 큰 결심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별 심정의 감흥이 없다. 수많은 아픈 환자들과 섞여 살아온 의사로서의 문제점인지는 몰라도 나도 참 무던하다 못해 매정하다싶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많은 생각을 하고
심지어 굳은 결심도 몇 가지 했는데 막상 직접 찾아 뵙고 보니 아무 감흥도 생각도 결단도 없이 그저 무념무상일 뿐이다. 힘겹게 길었던
세월이 결국 찰나이고 굴곡 많던 삶은 저 멀리 미지의 편평한 지평선을 너머 허망하다는 것 뿐...
좀 떨어진 곳에 편평한 무덤 두기가 보였다. 여의도 침례교회 담임 목사님이자 내 주례서 주시고 나를 침례해주신 한기만 목사님께서
최근 돌아가셔서 아버지 계신 곳 앞에서 쉬고 계셨다. 20여년 전에 17살 나이에 골육종이라는 아픈 병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따님
옆에 누워계신다. 만감이 교차한다.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살다 가야 그나마 만족스러울까? 남 보기에 만족스러운 삶이 아니라 내 자신이 본능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아버지 산소 앞에서 몇 가지 약속을 하고 마음 속에 새겨 놓고 왔다.
나는 오늘보다 내일이 궁굼한 삶을 이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할 것이다. 가족들이 뭐라하건 친구들이 뭐라하건 사회에서 뭐라하건 상관없이 내 기준으로 말이다.
이제는 남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 친가와 외가 합동 식사 , 장소 관계로 참석 인원수를 제한해서 원망을 샀다. ^_^)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연말의 여유 (0) | 2014.12.23 |
---|---|
에볼라 감염지역 의료진 파견 (0) | 2014.10.22 |
이젠 돌이킬 수 없이 꽉찬 50 이다. (0) | 2014.07.13 |
이제는 고통에서 벗어나셨을 아버지 (0) | 2014.06.16 |
조선일보 기사와 반론 (0) | 2014.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