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바쁜 일정으로 나는 늦잠을 잤는데 여자들 방에서는 6시 30분부터 헬스와 수영을 하고 난리였다. 역시 어머니의 부지런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단하시다. 하여간 느즈막히 정리하고 아침 겸 점심으로 밥을 먹으려 했는데 토요일 이른 아침이라서 마땅한 곳이 없어
그냥 아시야가와까지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사카 역에서는 시간상 15분의 가까운 거리라 한다. 어제 갔던 한신 백화점 앞 육교를 건너서 한큐 오사카 역으로 걸어갔다. 이곳을 많이
왔었다고 어머니는 회고하셨다. 어제 저녁식사에 메뉴를 정하는데 준식이의 일어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오늘도 기대를 해본다. 형인
내가 훨씬 일어를 잘 했을 텐데 참 대단하다 싶다. 하여간 든든한 통역이 있어서 오늘도 기대된다.
(아시야가와로가는 전철 안에서 )
전철 자동 판매기로 표를 구하고 올라탔다.(두 형제는 이 앞에서 작동법을 몰라 좀 헤맸다.) 기차는 구형으로 좌석이 벽으로 길게 붙어있었지만 실내는 참 아늑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하고 있었다. 기관사는 여자 아가씨인데 전형적인 일본 여성이다. 참 아담하게 생겼다. (그것뿐)
내가 수없이 지나왔을 풍경을 지나 아시야가와 역에 도착했다. 역도 참 아기자기하였다. 역전 상가가 그 동안에도 더 변한 듯 과거 15년 전에 왔을 때 덮고 있던 지붕은 없어졌다. 그래도 전반적인 방향감각은 잃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이 유지는 되어있었다.
(아시야가와역에 드디어 도착 )
바로 앞에 작은 시골 의원이 있어서 간판을 찍으려는데 노인 한분이 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일본말로 말씀하신다. 나는 준식이를 불러
통역을 부탁했다. 그냥 일본 의원 간판 사진을 찍고 싶을 뿐인데 내가 한국 의사인 것을 아시더니 간판에 불을 켜주신다. 이곳에서 3대째
의원을 하고 계시는 70대 노인으로 지금은 42세 아들이 하고 있단다. 전통이 있는 이런 시골 작은 의원이 한국에는 가능할지 의문이다.
낮은 의료 수가를 만회하기 위해 박리다매로 검사 규모를 크게 하는것이 한국의 개원방법인데 말이다. 한국이라면 벌써 부도나서
폐업했을 것이다. 게다가 진료 시간이 대부분 엄청나게 짧으니 그저 부러운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하루 종일 초인적으로 일하고도 3시간대기에 3분 진료 받는다고 국민들에게 쓴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나라 의대 교수들의 현실인데
말이다. (나도 단순히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원월급, 임대료, 소모품값, 감가상각비등 - 최소한 하루 70명의 환자를 봐야한다. 내 월급을 제외하고 말이다. 일본에서 이정도 볼 수도없거니와 만약 보면 아마 재벌 될것이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의사분 얼굴이 기억이 없는것을 보면 어머니께서 치료비 절약하시려고 아마 집에서 알아서 우리를 치료하셨을
듯 싶다. 3형제가 3년간 아무리 그래도 10번 이상은 아팠을 것인데 말이다. 하여간 한국에서도 머리 찢어져서 훈근이가 봉합 수술 한것도
돈 아깝다고 집에서 가위로 직접 뽑으신 어머니니 당연히 그러셨을 것이다. 하여간 이래저래 대단하신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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