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새로운 시도
재작년부터 피아노나 기타를 조금씩 치면서 음악 이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거의 외우고 치는 피아노 수준인데 그 악보가 없으니 완전히 장님이다. 요즘은 악보도 인터넷으로만 구할 수 있다. 나이들어 갈 수 록 서예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우리 동네에 서예학원을
찾을 수가 없다. 과거 일본에서 잠시 배웠던 기억이 있어 시작하는데 망설임은 없지만 배울 장소가 없다. 대입을 위한 입시학원 투성이다.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교양 프로그램은 있으나 다 노인이나 주부를 위한 낮 프로그램이니 나에게는 해당이 없다.
( 첫날 기본 연습 )
그러던 차에 이발을 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허름한 상가 3층에 서예학원 간판이 보이는 것이다. 창문에 한지로 붙인 모양이 조금은 어설펐지만 반가왔다. 건물도 그렇고 동네도 그렇고 서예학원으로는 적격으로 가격도 저렴할 것 같아 바로 찾아갔다. 원장님은 남자 선생님이신데 나와는 거의 동갑이다. 서예하시는 분이라 표정도 온화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측 손이 의수 상태이다. 순간 내가 수술했던 수많은 절단 환자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 사람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의수를 낀 분을 서예 선생님으로 모신다는 것이 뭔가 잘못 된 듯 하지만 더 이상 서예학원을 찾을 수 없어서 일단 배우기로 했다. 첫날부터 본인 설명을 장황하게 하신다. (약주를 이미 좀 하셨다.) 8남매중 외아들인데 대학교 일 학년때 교통사고로 우측 손을 절단하게 되었다한다. 그 이후 피나는 노력하여 좌측 손으로 글씨를 쓰시고 대회에서도 상을 많이 받으셨다 한다. 듣는 사람 마음이 안쓰러울 뿐이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 까 싶어 짠할 뿐이다. 일단 나는 기초가 필요한 것이니 원장님 수준이 높을 필요 없다는 생각에 무조건 시작했다. 특별한 삶을 살아오신 분에 대한 야릇한 궁금증도 한 몫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잡아 본 붓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글씨를 시작하기 전에 당연히 기본 연습부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먹물 냄새도 좋았고 글씨 써진 한지가 널려있는 사방 벽의 모습도 반가왔다. 처음 듣는 단어들로 설명을 해주셨다. ‘역입’으로 시작해서 ‘삼절’을 유지하면 간혹 ‘비백’도 보이다가 ‘회봉’으로 마무리하는 검은 글씨체는 보기에도 참 멋지다. 연습하면서 선생님의 과거사를 듣고 있자니 신기 했다. 서예 분야에도 도제 시스템이 있어 거의 3년 이상을 서예실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고 유명한 분들을 찾아 궂은일을 해드리면서 제자로서 사사 받으셨다니 조선시대 이야기 같다. 병원으로 치료 수련의들이 배우기 위해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수년을 지내온것과 같다.
여초 김응현의 서력에 대한 설명이나 ‘전서’의 중요성 등을 차근 차근 배워갔다. ‘행서’나 ‘초서’를 배우자는 마음이 앞섰지만 ‘전서’, ‘예서’ ‘해서’의 기본을 먼저 배워야한다는 말씀이셨다. ‘장봉’은 사군자용이고 ‘단봉’과 ‘세봉’이 있으며 ‘선질’이 좋아지기 위해 꾸준히 반복해야한다는 기초부터 붓으로 ‘중봉’을(붓끝이 중앙에 오도록) 유지하는 연습이나 붓의 면을 바꾸는 연습까지 내가 알아야할 기본을 하나씩 배워갔다. 기본을 배워 놓고 나서 전문화 시키는 것은 나의 추가적인 노력이니 무엇이든지 일단 발을 담그는 것이 중요하다는것이 내 지론이다. 그렇게 시작한지 2주일째가 되어 드디어 선생님에게서 체본을 받았다. (선생님이 써 준 글씨 교본인 ‘체본’을 보고 따라 쓰는 것을 ‘임서’라 한다.)
( 체본 ) (임서)
‘전서’도 나름 그 글씨 속의 기법을 이해하니 안보이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서필의 힘과 여백 그리고 마무리의 어려움들을 조금씩 알아갔다. 역시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제 시작이니 언제 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시작이 중요한 것이다. 가는데 까지 가보자.
( 예서 )
( 전서 )
( 초서 )
( 행서 )
무엇보다 좋은것은 맞은편에 실용음악 학원이 있다는 것이다. 일타 쌍피로 시간내서 이곳에 오는날 두가지를 다 배울까 한다. 사실 근무가 끝나면 피곤해서 이곳에 오기 귀찮아지니 말이다. 하여간 평소에도 음악 이론을 배우고 싶았는데 내친 김에 같이 등록하고 기본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두 가지를 같이 병행 한다는 것이 조금 무리이긴 하지만 일단 되는데 까지 해보는 거다. 지금까지 두 번 밖에 안 갔지만 벌써
내가 궁굼했던 이론을 많이 배웠다. 나머지는 반복 연습으로 익히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음악 이론은 약 3개월 정도면 어느 정도 될 것 같다. 병원 일이 바빠질 시기지만 뭐든 되는대까지 해보자.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항상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험만 없으면 평생 배우면서 살고 싶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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