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절 치료가 잘된 아이의 다리 석고 따는데 느닷없이 울면서 움직여서 석고 제거 기계에 순간적으로 피부가 찢어져버렸다.
결국 3바늘 꿰매고 부모에게 사과하고 씩씩하게 걸어서 좋게 퇴원했다.
그런데 얼마후 수백만원의 정신적인 피해 보상을 요구하더니 나를 형사 고발했다.
1주일에 하루 집에가고 집사람도 병원에서 늦게 퇴근 하는 생활이라 법원의 출두 명령서 등기를 받지 못했다고
결국 수취 거부로 취급하고 나를 수배내렸다.
나는 이런 상황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간만에 집에서 펜티 바람으로 혼자 쉬는데 갑자기 수갑채워져 파출소로 끌려갔다.
과실 치사 수배중으로 잘못 되어있는 것을 재확인 시켜달라는 내 항의에 검사님 퇴근했다면서 경찰들은
나를 성동 경찰서 유치장으로 넣어버렸다.
결국 다음날 오후 5시 되어서야 검사 만나서 사무작오로 확인되어 풀려났는데 한다는 검사놈 말이 ‘힉업했겠네?’
그 남 검사의 이름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더니 이젠 성 만 기억난다. 20년 지난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그짓하고 있을까?
그 뒤로도 그 아버지는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내가 수술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최대한의 집중을 했어야하는데 체력의 한계와 경험의 부족으로
잘못 수술한 몇케이스는 여전히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혹시 문제가 생겼으면 다시 다른 병원에서 재수술 했겠지만 미흡한 상태에서 내 손을 떠나 마음이 찹찹하다.
이외에도 여러 경험이 있다. 정형외과의 특성상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드라마틱한 경우는
별로 없다. 그냥 경험의 가치를 떠나 내 기억을 위해 남겨놓을까 한다.
손주목마 태우다 계단 헛디뎌서 목골절 후 사지마비되어 욕창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분
산에서 윗몸 일으키기 하다가 발이 빠지면서 미끌어져 목골절 후 사지 마비되어 지푸라기 잡을 심정으로 멀리까지 찾아와 주신 중년
(방법없다는 말에 실망한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청계천에서 강제로 성남으로 이주해서 고생 죽도록했다는 성남 할머니의 굳고 비틀어진 손
남편 죽고 자식남아 살기 힘들어 죽으려다 구룡산 기슭 마을 넘어와 산지 40여년되신분
아버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아래 수능 공부하다 어머니 위암발생으로 시험 포기한 여학생
(나중에 법학 전공합격했다해서 용돈 줬는데 지금은 뭘하고 있을까?)
6.25 참전 용사 노인의 압록강 전선에서의 무용담들
고물상 아주머지의 몸 냄새 위해 목욕비 주니 그 이후로는 다신 병원 안오시던일
아침마다 출근 도장찍는 독거노인들( 이분들의 고마움을 나중에야 깨닳음^_^)
일본 원폭 피해자로 일본에서 보상금 받고 있다는데 전혀 이상을 알수 없는 건강한 중년
따뜻한 아침 밥보다 돈을 달라는 소년소녀 가장들의 자존심
과거 쇄골 골절 수술 받은 청년의 현재의 변한 모습 ( 과거 청년시절 밝던 얼굴이 삶의 파도에 피곤한지 많이 안쓰러워 보였다.)
프루트 하는 아리따운 여성의 긴장된 손가락 인대 수술 후 다시 음악 활동하면서 내게 큰 위안을 줬던 일..
길리안 바레 병으로 마비되어 실려와서 인공 호흡기까지 달았던 예쁜 여대생의 주치의로서
마비로 누워 살다가 처음 부축해서 병원 복도를 힘겹게 걸으며 물리치료 해줬던일
( 멋진 의대 후배와 친한 사이여서 조금은 서운했다 )
.................. to be continued
< 1960년대 강제 이주 직전의 청계천 >